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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 안중근 기념관 개관

Author : 중국어과 / Date : 2014. 1. 21. 14:33 / Category : 중국리포트/중국관계


중국 정부가 지난 19일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개관했습니다. "안 의사의 구상은 특정국가의 이익을 벗어나 지역경제공동체와 공동방어론을 주장한 것이었다"는 동양평화론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입니다. 20세기 들어 일본을 비롯해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이 패권을 놓고 각축하던 만주 지역에서 동양평화의 구체적 비전을 제시한 이가 바로 안중근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역사적인 순간


이번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지면서 다시금 안중근 의사의 업적과 역사적인 의미가 다시금 빛나고 있습니다.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계에서 거물이었던 동시에 정계를 이끌고 있는 정치가로서 일본 국민에게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만주 문제로 러시아의 대표 코코프체프와 만주 하얼빈에서 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 위해서 하얼빈 역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의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독립 운동가 안중근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 큰 업적을 남겼지만, 그 즉시 체포가 되면서 1910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여순감옥에서 서거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 일로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다. 대한 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이라는 개인적인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거사에 대한 동기를 명확히 했습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상에 대해 낱낱이 밝히며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에도 애국심과 대한독립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안중근 의사의 투철한 독립운동에 감사하고, 그의 서거에 대해 추모하는 마음가짐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안중근 의사는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 분이시죠.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뜻과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를 손상시키는 언론의 음험함에 대해 비판한 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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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 남서울대 중국학과, 안중근, 안중근 기념관, 한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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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 중국의 여황제

Author : 중국어과 / Date : 2014. 1. 20. 17:09 / Category : 중국리포트/중국관계

천무후, 중국의 여황제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85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릉에는 당나라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가 잠들어있습니다. 건릉은 당 고종과의 합장묘이며 중국 내에서 진시황릉과 함께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황제능으로 꼽힙니다. 


후세의 기록들과 사가들의 평가(조문윤 등의 '무측천평전'을 참조함)를 근거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생애와 업적, 그 삶에 얽힌 일화, 우리역사와의 관계, 시비 공과 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측천무후는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시대인 당이 건국된 지 30년이 지난 시기인 624년 서족 출신이긴 하지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된 무사확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당나라 사람 최융에 의하면 "그녀는 뛰어난 외모에 이마에 부귀한 상"을 가졌다고 하였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 덕분에 열네살 되던 해에 당 태종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연스럽게 당태종의 통치술을 배우면서 엄격한 궁정교육도 받고 문화적 소양도 익혔습니다. 태종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자 태종을 문안하러 오던 황태자 이치(고종)도 측천무후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했고,  자신보다 4살 많은 명목상은 모자관계인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의 황금기를 이끈 여제… 잔인무도했다는 평도

   

태종이 죽은 뒤, 당시 풍습에 따라 무측천도 다른 비빈들과 함께 감업사에 가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자주 감업사로 가서 무측천을 만났고 무측천의 신분으로는 다시 황궁으로 가긴 매우 어려웠지만 고종의 황후(왕황후)와 또 다른 후궁 소숙비 사이에 질투가 극에 달하면서, 황후가 측천무후를 황궁으로 데려와 소숙비에 대한 고종의 총애를 빼앗고자 했습니다.

   

측천무후가 두 번째 입궁한 뒤 고종의 총애는 측천무후에게 향했고, 653년 딸을 낳았습니다. 어느 날 황후가 어린 공주를 보기위해 측천무후의 처소에 왔다 돌아간 후 측천무후는 딸을 몰래 목 졸라 죽이고 이불을 덮었다가 고종에게 황후가 한 짓이라고 하여 결국엔 황후를 폐위시킨 뒤 많은 재상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황후에 오릅니다.

   

고종은 오래도록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660년부터 중풍으로 머리가 무겁고 눈앞이 침침해서 측천무후가 정무 처리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683년 고종이 죽은 뒤 측천무후는 이미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었고  비록 황태자 이철(李哲)이 중종으로 황위를 계승하였지만 중종은 무측천을 황태후로 받들었고, 측천무후는 정사를 모두 결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종이 즉위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파당을 만들려 하였다는 이유로 측천무후는 그를 여릉왕(廬陵王)으로 낮추고 황위를 박탈하였고, 측천무후가 계속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측천무후는 우선 조정의 면모를 쇄신하기 위해 관복의 색상, 백관의 호칭, 관직명도 대폭 변경하였습니다. 5년 뒤(689年)에 반포된 조서에서는 자신이 창조한 글자가 들어있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9월 9일 중양절 측천루에 올라 만백성이 보는 앞에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합니다.

   

측천무후는 통치기간 동안 농업생산을 중시해 둔전과 영전을 실행하였으며, 수리 공사를 펼쳤습니다..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3천700만 이상으로 늘었으며, 수공업과 상업 및 교통이 동시에 번영했습니다. 측천무후는 경학, 역사학, 문학을 모두 중시하였고, 여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 역사와의 악연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당과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우리 역사 속에 그녀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그녀가 직접 통치한 것은 아니더라도 당 고종이 661년 고구려를 압박하고 백제와의 전투를 지원했을 때, 662년 신라 문무왕 등과 합세해 백강에서 백제를 평정했을 때, 668년 고구려가 멸망당할 때도 황후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 고구려가 평정된 지 5년 후 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도왔다고 당이 토벌하려 했을 때, 안동도호부에 있던 설인귀가 토번전에 참전하기 위해 당으로 돌아간 틈을 타서 검모잠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이에 678년 신라를 치기로 했을 때에도 무측천이 있었습니다. 발해와의 관계에서는 무측천이 직접 개입하는데  696년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망명한 후 무측천은 이해고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고 먼저 걸사비우를 죽였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무측천은 이처럼 그다지 반가운 인물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가들은 그녀의 빛나는 정치업적을 칭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능력 있는 사람을 임용했고, 재난 당한 백성을 구제했으며, 간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등문고를 설치하여 언로를 넓히고, 덕과 재능을 겸비하고 군주에 충성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관료가 되라는 《신궤》라는 책을 몸소 집필하기도 했으며 법제를 강화했습니다. 측천무후가 당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 역사가들이 의견을 같이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평가도 많습니다. 측천무후가 나이가 들어 여릉왕 중종을 황태자로 다시 옹립한 뒤, 무씨와 이씨 사이와 갈등으로 정변이 일어났고, 그 결과 무측천은 폐위당하고 중종이 복위한 뒤 705년 구중궁궐에 갇혀 쓸쓸하게 여든 둘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한 것도 사실입니다.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정적을 제거할 때 혹리를 이용하는 잔인함이 있었으며, 늙어서까지 수많은 남총을 거느렸던 부도덕 때문에 신랄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중국의 240명의 역대 황제 중에 유일한 여성이었던 측천무후를 위해 건릉에 세운 비인 '무자비(無字碑)'는 찬란한 업적이 너무 많아 글로 표현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글자 그대로 무자비하게 친자식까지 죽인 과오가 기록될까 하는 두려움 과 함께 죽기직전 자신의 행적을 자성했기에 새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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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허우와 주링허우

Author : 중국어과 / Date : 2014. 1. 20. 16:42 / Category : 중국리포트/중국관계


바링허우 - 중국 소비의 중심           

 

바링허우(80後)는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중국 신세대를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중국을 잡으려면 바링허우의 마음을 잡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바링허우가 차이나의 뉴파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바링허우는 1979년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때 '1가구 1자녀 정책'의 영향 하에 태어난 소위 '샤오황띠(小皇帝:꼬마 황제)' 세대입니다. 현재 20~29세 연령대에 있는 중국 바링허우 인구는 약 2억4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주로  외동 딸·외동 아들로 귀하게 자란 이들은 과거 세대와 달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 탓에 명품을 좋아하고 소비지향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중국 자동차 시장을 예로 들면, 최근 중국에서는 18~25세 자동차 구매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2004~06년 으로 간 바링허우 세대의 자동차 구매자 점유율은 5.6%에서 10.6%로 2배 가까이 상승하였습니다.

   

또 2008년 통계에 따르면, 20대 자동차 구매자가 전체 자동차 소비자의 15%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중국의 신용카드 산업 역시 바링허우가 주축입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국 전체 신용카드의 약 77%가20-29세의 바링허우 세대에게 발급되었다. 자동차와 신용카드 시장의 사례는 바링허우가 중국 소비시장의 주력층으로 성장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례 입니다.

   




 바링허우는 중국 경제의 고도 성장을 지켜보며 자라난 연유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애국주의 내지는 민족주의 편향의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바링허우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작년 베이징올림픽 당시 프랑스에서 성화 봉송 방해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에 진출한 까르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주역이 바로 바링허우였습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바링허우가 최초의 하한주(哈韓族) 세대라는 점 입니다.. '하한주'란 한국 대중문화 마니아를 가리키는 유행어인데 바링허우는 초중고생 시절 한국 드라마와 노래를 들으며 성장한 탓에 한국팬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한 바링허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 노래를 듣고 한국 연속극을 보기 시작했고  당시에 안재욱이 큰 인기였는데 《별은 내 가슴에(星夢奇緣)》라는 한국드라마는 바링허우라면 모두 다 봤을 거라고 합니다. 후에 《가을동화(色生死)》《모델(天桥风云)》《겨울연가(冬日歌)》《유리구두(璃鞋)》 등이 중국에 상륙했습니다.


한국 가수로는 H.O.T가 98년에 중국에 들어왔고, Baby SES 신화(神話) FTTS NRG 등이 연속해서 중국에 자리 잡았습니다.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 불었던 한류 열풍과 가장 밀접한 세대가 바로 바링허우입니다.

 

주링허우의 등장

  

그런데 최근 중국 인터넷 상에는 바링허우에 대한 비판자가 등장하여 시끌시끌하합니다. 비판자는 주링허우(90후:90년대생을 말함)라는 또 다른 신세대입니다. 요즘 주링허우(90후)는 바링허우(80후)를 낡은 세대로 취급하며 '딸기족(草族)'이란 별명을 붙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딸기는 보기엔 탐스럽고 먹음직스럽지만 금방 물러터짐을 비유하는데, 바링허우가 신세대로서의 신선함을 이미 상실했다는 비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중국 인터넷을 검색하면 바링허우와 주링허우의 차이점을 다룬 게시물이 즐비한데, 한 네티즌은 양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비교하고 있습니다다. "80후는 직장에서 추가 근무를 거절하지만, 90후는 아예 출근을 거절한다. 


80후는 한국 마니아가 많고, 90후는 일본 마니아가 많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띕니다. 이는 중국에서 한류(韓流)와 일류(日流)의 성행 시기가 각각 90년대와 2000년대로 차이가 나는 것에 기인하지만, 중국에서의 한류 열풍이 새로운 변화와 도전의 국면에 진입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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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 바링허우, 주링허우, 중국 신세대, 중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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